Ⅰ. 서론
종교개혁의 선구적 운동은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 프랑스 남부지방에서의 이단운동에서 비롯되어 영국은 14세기에 John Wycliffe(1324~1364)에 의한 복음주의적 개혁운동이 있었고, 15세기 초에는 보헤미아의 John Huss(1375?~1415)가 개혁을 부르짖었으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루터에 의하면 위클리프
루터교
세례는 구원을 받기 위해 필수적인 과정이며 성사의 요구조건으로 하고 있다. 한 예로서, 마르틴 루터는 1529년에 "The Large Catechism"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간단히 말해서, 세례의 능력과 효과와 유익과 열매는 구원이다. 왕자가 되기 위해 세례를 받는 사람은 없다. 단어 그대로 "구원받기
17세기에 독일에서 일어난 경건주의 운동은 종교개혁 이후 침체해진 교회에 새로운 활력과 개혁을 가져다 주었다. 경건주의자들 가운데 프랑케는 교회의 영역뿐만 아니라 독일 사회 전반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는 루터교정통주의의 토양 아래서 자랐으며 학문과 경건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정통주의, 특히 루터교주의를 반대했다. 대부분 그의 논쟁은 초월성만을 주장하는 정통주의자들과의 관계에서 일어났다. 그는 그들이 거짓된 형이상학을 채택하여 하나님, 그리스도, 자아, 죄, 화해, 교회의 개념을 손상시켰다고 보았다. 리츨은 하나님은 절대자라기 보다는 사랑으로 정의했다. 여기서
루터교 집안에서 성장했다.” 카터 린드버그, 『경건주의신학과 신학자들』 이은재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9), 183
스페너는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에 입학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철학, 언어, 역사, 신학 등을 배웠고, 1653년 이곳을 졸업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 시간 1659년까지 요한 슈미트(Johann Sc
낙관적으로, 초교파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청교도들의 금욕주의적인 영성, 단하우어로부터 습득한 루터교의 만인제사장주의, 제네바에서 만난 라비디의 경건적 체험에 대한 욕구, 아른트의 실천적이면서도 신비주의적인 경건, 성경 이것이 그의 영성적 삶을 이루는데 참된 도구들이 되어주었다.
정통주의에 반발하여 일어난 것이었다. 경건주의는 카톨릭의 신비주의 및 잔센주의(Jansenism)와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운동 및 퀘이커 운동과 18세기 잉글랜드의 감리교 운동과 유사한 신앙 운동이었다. 이 두 운동은 개인의 내면성에 주목했으며, 개인의 경건과 헌신을 강조했다. 이 두 운동으로 인하여
예배는 존경할 대상에게 경배 드리는 일체의 행위로,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 후 카톨릭과 개신교가 분리되어 독자적 예배의식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중 루터교회가 추구하는 예배는 카톨릭의 타락을 비판하고 초대교회 회복을 위해 노력하며 설교와 성례전의 신학적 개념을 재정립하고, 이를 예배형식
월터 라우쉔부쉬 (Walter Rauschenbush)의 윤리사상
I. 월터 라우쉔부쉬 (Walter Rauschenbush, 1861-1918)의 생애
월터 라우쉔부쉬는 1861년 미국 뉴욕 로체스터에서 태어났다. 미국에 선교사로 건너왔다가 루터교를 떠나 독일 침례교 목사가 된 아버지에 의해 경건주의적 전통을 가진 보수적 침례교회의 영향을 받고
정통주의적 고정화 경향에 반대하여 일어났던 프로테스탄트적 종교운동으로 P.J.슈페너와 A.H.프랑케가 주창하였다. 슈페너는 영국의 청교도와 제네바 개혁파교의 영향을 받아 1675년에 『Pia desideria』를 저술, 그리스도교는 지성의 영위이기보다는 심정의 영위라고 하면서, 당시 루터교회의 지성주의를